김혜순 시인은 워낙 글을 잘 쓰신다고 명성이 자자하셔서 늘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문지에크리 서평단을 통해서 첫 만남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시인의 명성답게 첫 문장부터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아시아인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끝끝내 여자라는 것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평생의 숙제이다. 그 속에서도 여자짐승아시아하기는 여성, 아시아인, 짐승이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존재를 보다 거시적으로 탐구한다.
사회는 제도들과 규칙, 언어 체제 속에서 견고하게 지은 여성과 아시아인이라는 규정을 만들고 나의 부재를 일으킨다. 여성을 아내와 엄마로서 지정하였고 김혜순은 이 모순 속을 살아가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죽은 자, 사라진 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말한다.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부재를 느껴봤을 것이다. 나의 최초의 부재를 느낀 것은 여성으로 지정되었을 때였다. 내가 원하는 ‘나’를 알아볼 시간도 없이 나는 여성이 되었다. 여성으로서 옷을 어떻게 입고 행동을 어떻게 하고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말이다. 나는 여성이 되고 우리가 되어 하나의 대상으로서 통합되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제대로 된 나 그리고 내 안의 여성을 만나기 어려웠다.
김혜순의 여행을 함께 하며 우리가 잊고 있던 사실, 내가 아시안인이고 짐승이며 끝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아간다. 끝끝내 나는 여성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퇴폐, 슬픔, 분노, 타락은 어떤 방식으로라도 표출된다. 마치 독재 정권 속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이 저항하고 체념하다가 끝내 목숨을 바쳐 독재자를 막아내던 것처럼 말이다.
책 속에서 네가 나를 여자로 부르자 나는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너는 사라져가는 나의 뒷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한 여자의 수만 가지 분열을 견뎌본 적이 있는가.(p.68)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을 읽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여자로서 살아가며 느낀 나의 부재 그리고 분열이 문장이 되어 숨 쉬고 있었다. 시인의 통찰력과 표현력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책은 짧고 가볍게 읽기 좋았지만 왜 김혜순이 김혜순인지를 말해주었다. 시인의 날개환상통을 당장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산문이었다. 문지에크리의 다음 책들도 정말 기대된다.